[시성 미사 강론] “말이 아니라 삶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해야”


복자 안드레아 데 소베랄, 암브로지오 프란치스코 페로, 마태오 모레이라와 27명의 동료 복자들, 복자 크리스토포로, 안토니오와 요한, 파우스티노 미구에스, 안젤로 다 아크리의 시성 미사

                                     프란치스코 교황의 강론

                                           성 베드로 광장

                                    2017년 10월 15일, 주일
 

우리가 들었던 비유는 혼인 잔치와 같은 하느님 나라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마태 22,1-14 참조). 주인공은 임금의 아들, 신랑으로서, 그의 모습 안에서 예수님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비유에서는 신랑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고, 열망하며 기대에 찬, 초대받은 손님들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혼인 예복을 입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초대받은 사람들은 바로 우리, 우리 모두를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와 함께 “혼인 잔치를 열고” 싶어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인생 전체가 친교를 이루도록 축하하는 자리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원하시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그분에 대한 우리의 관계는 단지 임금에게 충성하는 신하의 관계, 주인에게 충실한 종의 관계, 혹은 스승과 맺는 부지런한 학생의 관계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신랑과 사랑하는 신부의 관계이기도 합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원하시고, 우리를 찾으시며 초대하시고, 우리가 의무를 다하고 당신의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참된 삶의 친교를 바라시고, 대화, 신뢰와 용서로 이루어진 관계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요, 주님께서 자비롭게 먼저 손을 내미시고 우리만 초대받았다고 자랑할 수 없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그 누구도 다른 이들에 비해 더 많은 특권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특권을 받은 것입니다. 이 무상의 사랑, 애정이 넘치고 특권을 받은 사랑에서 항상 그리스도인의 삶이 태어나고 다시 부활합니다. 우리는 적어도 매일 한 번 그분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주님께 고백하는지 자문해볼 수 있습니다. 많은 말들 가운데 매일 그분께 “주님,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제 삶의 전부이십니다”라고 말하는지 자문해봅시다. 왜냐하면 만일 사랑을 잃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은 메마른 땅이 되고, 영혼이 없는 육체, 실현 불가능한 윤리, 이유 없이 끼워 맞추며 살아야 하는 원칙과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생명의 하느님께서는 생명의 응답을 기대하시고, 사랑의 주님께서는 사랑의 응답을 기다리십니다. 묵시록에서, 주님께서는 한 교회를 향해 맹렬히 책망하십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2,4). 바로 여기에 위험이 있습니다. 추진력 없이, 열정도 없이, 짧은 기억만 가지고, “평범한 삶”에 만족하며, 관습에 젖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고 맙니다. 그 대신에 첫 사랑의 기억을 되살립시다. 우리는 사랑 받았고, 혼인 잔치에 초대받았으며, 우리의 삶은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매일매일이 초대에 응답할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경계하게 합니다. 그런데 초대가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초대받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거절했습니다. 복음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어떤 자는 밭으로 가고 어떤 자는 장사하러 갔다”(마태 22,5). 계속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라는 단어입니다. 거절의 동기를 이해하기 위한 열쇠입니다. 사실 초대받은 사람들은 혼인 잔치가 슬픈지 혹은 지겨운지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순하게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일이었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에만 흥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나쁜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것, 곧 안정, 자기 확증, 편안함 등을 선호했기 때문에,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득, 쾌락, 약간 즐겁게 지내게 만드는 취미생활이라는 소파에 드러눕게 되지만, 아주 순식간에 흉하게 늙어버립니다. 내면이 늙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넓게 펼쳐지지 못할 때, 마음은 닫히고, 늙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나의 ‘자아’에 의존할 때, 곧 내 마음에 드는 것에, 내게 유익한 것에, 내가 원하는 것에 의존할 때, 냉혹하고 나쁘게 변하고, 아주 악한 방식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는 마치 복음의 초대받았던 사람들처럼, 초대하러 온 종들이 단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그들을 모욕하고 붙잡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던 것과 같습니다(6절 참조).

그래서 복음은 어느 편에 설 것인지 묻습니다. 내 자아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의 편에 설 것인지?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이기주의에 반대되시고, 자기중심에 반대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초대를 받지만 계속 거부하는 이들 앞에서, 당신의 초대에 마음을 닫은 이들 앞에서, 잔치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시킨다고 복음은 말합니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초대하십니다. “아니요” 앞에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포섭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부당한 대우를 받으셨지만, 더 큰 사랑으로 대응하십니다. 우리는 잘못과 거절에 의해 상처 입었을 때, 불만과 원한을 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아니요” 때문에 고통을 겪으시지만, 계속 다시 두드리시고, 악을 행하는 자를 위해서도 선을 준비하시려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십니다. 사랑이 그런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십니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하는 것이 악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으시고, 우리를 그분처럼 행하도록, 진정한 사랑에 따라 살도록, 쉽게 화내고 게을러 빠진 우리 자아의 변덕과 체념을 극복하도록 끌어당기십니다.

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마지막 측면이 있습니다. 곧 초대받은 이들의 예복인데, 필수불가결한 조건입니다. 사실 초대에 한 번 응답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네’라고 말하면 다 된 것이 아니라, 예복을 입을 필요가 있고, 매일 사랑을 살아가는 습관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고 살지 않으면서 “주님,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마태 7,21 참조). 매일 당신의 사랑을 옷 입고, 매일 하느님의 선택을 쇄신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시성된 성인들, 특히 많은 순교자들은 이런 삶을 보여줍니다. 그들은 말로만 사랑에 대해 ‘네’라고 말하지 않았고, 끝까지 삶을 통해 응답했습니다. 그들의 일상 예복은 예수님의 사랑이었고, 그분의 어리석은 사랑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셨으며,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에게 당신의 용서와 옷을 남기셨습니다. 우리 또한 세례성사 때 흰옷을, 하느님을 위한 혼인 잔치 예복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형제 자매 성인들의 전구를 통해, 매일 이 예복을 선택하고 입을 은총과 이 예복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는 은총을 그분께 청합시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두려움 없이 주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그분과 사랑의 축제를 거행하는 혼인 잔치의 신방에 들어가기 위한 결정적인 발걸음입니다.

 








All the contents on this site are copyrighted ©.